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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 인사이트

인도네시아가 빗장을 걸자 말레이시아가 웃었다? (자원부국으로 이민 온 나의 거시적 이유)

by 살기 좋은 말레시이아 2025.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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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에 정착한 가장 큰 이유는 조금 거창하지만 '거시적인 생존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 '자원빈국'입니다. 가진 게 없으니 사람을 갈아 넣어(인적 자원) 고혈을 짜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구조, 소위 '헬조선'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죠.

반면 말레이시아는 땅 밑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땅 위에서는 팜유(Palm Oil)*가 솟아나는 축복받은 '자원부국' 입니다. "기름이 고갈된다"는 말은 수십 년째 들려오지만, 유가가 폭등할 때마다 나라 곳간이 두둑해지는 이곳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자원부국은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오늘은 그 제 예상이 적중했던 사건, 인도네시아 팜유 수출 금지 사태와 그 이면에 숨겨진 **자원부국의 그림자(헤이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 팜유 전쟁: 형님(인도네시아)의 실수, 아우(말레이시아)의 횡재

2022년 4월, 세계 1위 팜유 생산국인 인도네시아가 갑자기 **"팜유 수출 금지"**를 선언했습니다. 자국 내 식용유 가격이 폭등하자 물가를 잡겠다며 빗장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전 세계 식용유 시장은 패닉에 빠졌지만, 세계 2위 생산국인 말레이시아는 표정 관리에 들어갔습니다.

  • 반사이익: 인도네시아산 팜유를 못 구한 전 세계 바이어들이 말레이시아로 몰려들었습니다.
  • 가격 폭등: 팜유 가격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말레이시아 정부와 팜유 기업들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제가 이민 올 때 기대했던 **"자원이 돈이 되는 나라의 방어력"**이 증명된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이었다면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물가 대란이 일어났겠지만, 이곳은 오히려 국부(國富)가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2. 자원부국 거주자의 특권: "식용유가 물보다 싸다?"

그렇다면 현지 교민이 체감하는 혜택은 무엇일까요? 바로 **정부 보조금(Subsidy)**입니다. 말레이시아 마트에 가면 비닐봉지(Polybag)에 담긴 1kg짜리 식용유를 볼 수 있습니다.

  • 가격: 2.50링깃 (약 750원)
  • 특징: 정부가 자국민을 위해 팜유 가격을 통제하고 보조금을 쏟아부어 가격을 고정해 둔 필수재입니다.

국제 팜유 가격이 아무리 폭등해도, 산유국 시민들은 정부의 방어막 덕분에 큰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한국의 치열한 경쟁을 피해 이곳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인 '자원의 안전판'입니다.

 

 

 

 

 

 


3. 빛과 그림자: 부(富)를 위해 숲을 태우다 (헤이즈의 진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팜유가 가져다주는 풍요 뒤에는 **'헤이즈(Haze)'**라는 지독한 환경 재앙이 숨어 있습니다.

팜나무는 주기적으로 다시 심어야(Replanting) 생산성이 유지되는데, 이때 병충해와 바이러스를 없애고 땅을 개간하는 가장 싸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화전(Slash-and-burn, 숲을 태우는 것)'**입니다.

  • 매년 반복되는 재앙: 주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칼리만탄 지역, 그리고 말레이시아 일부 지역에서 숲을 태운 연기가 편서풍을 타고 넘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뒤덮습니다.
  • 서울보다 더러운 공기?: 헤이즈 시즌이 되면 대기질 지수(API) 앱을 켜기가 두렵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연 가득할 것 같은 서울 강남의 공기가 이곳보다 훨씬 깨끗하게 나오는 날이 많습니다. (물론 한국 앱의 수치가 부동산 가격 방어를 위해 조정된 것 아니냐는 의심 섞인 농담도 있지만, 헤이즈의 독성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땅 위에서 돈(팜유)을 뽑아내기 위해 맑은 공기를 희생시키는 것. 이것이 자원부국이 치르고 있는 비싼 수업료입니다.

 

 

 

 

 

 

 

📊 팩트체크: 서울 공기가 말레이시아보다 깨끗하다? (오해와 진실)

많은 교민분들이 "헤이즈 시즌에 한국 미세먼지 앱을 켜면 서울은 파란색(좋음)인데, 여기는 빨간색(나쁨)이다. 이거 한국 앱이 부동산 방어하려고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의심을 하십니다.

객관적인 수치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2023년 IQAir 세계 공기질 보고서에 따르면, 각 수도의 연평균 초미세먼지(PM2.5) 농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 2023년 연평균 초미세먼지(PM2.5) 농도 비교

(단위: µg/m³, 수치가 낮을수록 깨끗함 / 출처: IQAir 2023 Report)

도시 (국가) 오염도 (PM2.5) 세계 순위 (나쁜 순) 상태 평가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43.8 7위 (최악) 매우 나쁨
서울 (대한민국) 19.2* 30위권 보통 ~ 나쁨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약 14.0 60위권 밖 보통 (양호)
싱가포르 13.4 66위 (깨끗함) 좋음

 

 

 

😲 충격적인 반전의 진실

  1. "끝판왕" 자카르타: 자카르타는 전 세계 수도 중 대기 오염 7위를 기록할 만큼 공기가 심각합니다. 서울보다 평균적으로 2배 이상 더럽습니다.
  2. 평소엔 KL이 서울보다 깨끗하다: 연평균 데이터로만 보면,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는 서울보다 공기가 깨끗한 것이 사실입니다. 비가 자주 와서 먼지를 씻어내기 때문이죠. 서울은 봄철 황사 등으로 공기가 나쁘다고 느끼지만, 연평균으로 보면 자카르타 같은 동남아 대도시보다는 훨씬 양호합니다.
  3. 그런데 왜 헤이즈 시즌엔 지옥일까?: 문제는 '평균의 함정'입니다. 말레이시아는 평소엔 깨끗하다가, 인도네시아발 화전 연기가 넘어오는 8~10월(헤이즈 시즌)에 수치가 **150~200(PM2.5)**까지 폭등합니다.
    • 이때만큼은 서울의 공기가 천국처럼 느껴지는 것이 데이터상으로도 사실입니다.
    • 아무리 선진적인 정화 시스템을 갖춘 싱가포르라도, 옆 나라(인도네시아)에서 넘어오는 거대한 화전 연기(Haze)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 헤이즈 시즌이 되면 싱가포르의 수치도 100~200을 넘나듭니다. 이는 **"환경 재앙 앞에서는 국경도, 선진국도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 앱마다 색깔이 다른 이유 (부동산 음모론?)

한국 앱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측정 기준(Scale)'이 다릅니다.

  • 한국 기준: 35µg/m³까지를 '보통'으로 봅니다.
  • WHO/국제 기준: 15~25µg/m³만 넘어도 '나쁨'으로 표시합니다.
  • 따라서 같은 수치라도 한국 앱에서는 파란색(좋음)으로, 국제 앱에서는 노란색(보통)이나 주황색(나쁨)으로 뜰 수 있습니다.

 

 

 

 


4. 마무리: 완벽한 낙원은 없다, 하지만...

사람을 갈아 넣어 성장한 한국이 싫어 자원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로 왔습니다. 덕분에 국제 원자재 파동에도 비교적 평온한 경제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1년에 한두 달은 매캐한 연기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헬조선에는 고혈(膏血)이 있고, 자원부국에는 연기(Haze)가 있다."

어디에나 장단점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일 당장 기름이 없어 굶어 죽진 않겠구나"라는 원초적인 안도감, 그것 하나만큼은 자원부국이 주는 확실한 선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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